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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通

경기도 역사기행|화성 제암리

화성 제암리
뜨거운 피로 抗日 외친 ‘3·1만세운동’

 

▲ 제암리. 앞의 ‘3·1운동순국기념탑’은 1959년에 세워진 기념탑을 규모를 키워 1983년 다시 세운 것이다. 탑이 있는 자리가 원래 제암교회가 있던 자리다.

1919년 3월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뜨거운 달이었다. 일제에 항거 하기 위해 전 국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 어났던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해요, 달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는 ‘3·1만세운동’의 가장 비극적 인 장소가 있다. 바로 화성 제암리다. 제암리는 화성시 향남읍 발안사거리에 서 발안IC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 편으 로 보이는 마을이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 가 있어 ‘두렁바위’ 또는 ‘제암’이라 불린 것에 유래해 제암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치열했던 화성의 3·1운동
흔히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본경찰과 헌 병들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제암리 학살사건은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끈질기 고 격렬한 ‘3·1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의도된 보복으로, 치밀한 계획아래 자행 된 만행이었다.
제암리 사건이 있기 전, 화성 지역의 ‘3·1만세운동’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치열 했다. 1919년 3월 26일, 서신과 송산 주 민 1,000여명이 사강에서 독립운동 시위 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총기를 난사한 일본인 순사가 처단됐다. 3월 30일에는 발안장터에서 1,000여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을 벌여 두 명이 순국하고 경찰관주 재소와 우체국이 불탔다. 4월 3일에는 우 정, 장안 주민 2,0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여 3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총기를 난사한 일본인 순사가 주민들에 의해 처단되고 이 일대 경찰관 주재소가 불탔다.
급기야 일제는 4월 4일 일본군을 동원해 주재소가 불탄 화수리를 급습, 가옥 수십채를 태우고 이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사망한다. 이튿날은 수촌리를 급습해 가옥 38채를 불태우고 주민 8명이 총과 칼에 부상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날 오후 발안장터에서는 일본군의 보복에 항의하는 만세시위가 다시 벌어지고 주민 70여명이 잡혀가 고문을 받게 된다. 이후 일제는 인근 마을을 돌며 계속해서 주민을 잡아가고 방화를 하는 등 보복을 자행했다.

일본군경에 의해 29명 숨져
제암리 사건은 4월 15일 벌어졌다. 발안주재소 일본경찰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78연대 소속 헌병 1개 소대 30여명이 제암리를 찾아와 일전에 있었던 발안장터 시위에서 심하게 해 사과하고자 왔다며 15세 이상 남자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당시 발안주재소 사사카 소장은 주민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자리에 없는 사람들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불러왔다고 한다.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일본군은 교회 문에 나무를 대고 못질을 한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예배당을 포위하고 총까지 쏘았다. 이 과정에서 예배당 앞 마당에서 남편이 갇혀 불타는 것을 보고 절규하던 두 명의 부녀자를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또 제암리 옆 고주리의 천도교인 6명도 결박해 산으로 끌고 가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교회를 불태우고 난 후 일본군은 마을 주택 모두를 불태웠다.
당시 만행의 피해자는 교회 안에 있던 21명과 교회 뜰에 있던 부인 2명, 고주리 천도교인 6명 등 29명에 이른다. 이 사건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현장을 찾아 사건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폭로함으로써 기록으로 남았다.


▲ 새로 세워진 제암교회를 중심으로 순국기념관, 전시관 등이 있다.

▲제암리에서 희생된 23인의 순국선열들이 합장되어 있는 유택. 전시관과 정신교육관 사이에 조성되어 있다.(왼쪽사진)▲23인상징조형물. 묘소 앞 계단 옆에 조성되어 있다.(오른쪽사진)

사라질 위기 면한 기념비
해방이 되고 난후인 1946년 6월 4일 제암리 마을 입구에 주민들이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월북 작가 박세영의 <추도시>가 새겨졌다.

추도시

비바람 지나간 지 스물 여섯 해
두렁바위 들꽃엔 이슬이 방울방울
불에 타고 총칼에 쓰러진
임들의 한 맺힌 넋이드뇨
조국을 찾으려는 장한 그 뜻
이제 겨레의 산 힘 되었기에
왜놈은 망하고 한민의 나라 섰으매
거친 밤 촉새되어 울던 노래 그치라.


원래 이 추모시의 ‘한민의 나라’는 ‘인민의 나라’였던 것을 좌익척결에 나선 군인들에 의한 파괴를 우려한 면 서기가 기지를 발휘해 한민의 나라로 바꾸어 놓아 화를 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3개의 기념비와 탑이 있다. 1946년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박세영의 추모시가 적힌 기념비, 1959년 구 예배당 자리에 세워진 ‘3·1운동순국기념탑’과 1983년 이 보다 규모를 키워 다시 세운 현재의 기념탑이 그것이다.
현재 제암리 일대는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이신덕 기자 l opence@gfe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