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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通

COVER STORY | ‘성공’을 꿈꾸는 ‘실패’ 1

 



‘16%’. 이는 지난 30년간 한국 100대 기업의 생존율이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84%의 기업들이 한국 경제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즉, 30년간 16개의 기업만이 지속 경영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CEO라면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기업을 창업한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손에 쥐는 CEO는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CEO들이 달콤한 ‘성공’보다 ‘실패’의 쓴 맛을 보기 일수다. 현실적으로 성공의 확률보다 실패의 확률이 더 크기 때문이다. CEO들에겐 성공보다 ‘실패’가 더 가깝다. 문제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사례는 넘쳐나는데 반해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대다수의 한국 기업들은 ‘성공’을 위한 전략은 있지만 ‘실패’에 대한 대비책은 없는 상황이다. ‘실패’ 가 단순히 실패에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성공’의 자산이 되는 ‘실패’, 기업의 재기를 돕는 똑똑하게 실패하는 법에 대해 알아봤다.

■ 글 l 특별취재팀


실패, 독보다 약
재도전 위한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실패는 자연스러운 시행착오… 美 실패담 공유,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

매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FailCon(Failure Conference)’이라는 이름의 컨퍼런스가 열린다. 수백 명이 참가하는 이 컨퍼런스는 말 그대로 실패 컨퍼런스이다. 기업가들이 나와서 자신은 어떻게 실패를 했는지, 그 실패로 부터 무엇을 배웠고, 그래서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참석자들에게 강연하고 토론을 벌인다.
이 컨퍼런스를 기획한 카스 필립스는 한 인터뷰에서 “500여명 참석자들에게 ‘창업해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지’를 물으면 절반이상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손을 든다”며 “이 컨퍼런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실패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문화, 창업 환경에 영향
“미국 실리콘밸리엔 ‘실패를 하려면 빨리 해라. 그래야 또다시 실패를 겪을 수 있으니까’라는 문화가 있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아이디어가 괜찮다면 투자를 했다가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한 건의 성공이 수많은 실패를 커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경쟁력서밋 참석 차 한국을 방문한 찰스 홀리데이 2세(뱅크오브아메리카 회장) 세계 경쟁력위원회연합 의장은 ‘실패’에 대해 관대한 미국의 기업 환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실패가 쌓여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기업에게 있어 실패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인 동시에 남들과 공유하는 지식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인에게 ‘실패’란 숨겨야 할 금기어다. 한 번의 ‘실패’가 재기를 옭아매는 낙인이 되면서 이를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기업환경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쉽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결국 창업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불었던 벤처붐은 수많은 벤처기업의 등장과 함께 네이버, NC 소프트 등 성공신화의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국내 벤처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청년창업의 열기가 급격하게 사그라들면서 벤처CEO의 고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2012년 벤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전체 벤처CEO 중에 20·30대 비중은 19.5%에 불과했다. 2000년에 54.5%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10여년 만에 청년창업가 숫자가 3분의 1수준으로 줄어 든 것. 반면 50·60대 CEO 비중은 33%로 2000년(10%) 대비 세 배 이상 증가했다. 벤처 CEO 5명 중 4명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국내 벤처기업 CEO 고령화의 원인으로 기업가정신 실종을 지목하고 있다.
배종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2000년 이후 스타 벤처기업은 늘지 않고, 우수한 인력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창업을 꺼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학생들은 창업대열에 뛰어들기 보다는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과 대기업 입사 등 안정된 직장을 찾아 취업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취업포털인 잡코리아에 따르면 대학생의 60% 가량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27.9%)하고 있거나 한 때 준비한 적이 있는(32.5%)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들이 창업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창업과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창업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남녀 815 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75% 가량이 우리 나라 사회를 ‘실패할 경우 재기가 어려운 사회’라고 말했다. 또 92%의 응답자는 ‘창업실패는 개인 파산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거의 모든 창업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 이런 가운데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결국 창업 시장의 경직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박철규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성공한 벤처인들도 엇비슷한 실패를 겪었다”며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창업에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로 몰고 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지난 10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국내 최초 실패 컨퍼런스 ‘2013 재도전 컨퍼런스’ 현장.

실패에 대한 부담감 줄여야
고기능 소재를 활용한 척추고정기기 ‘엑스-플렉스’를 개발해 전국 병원에 공급하고 있는 ‘강앤박메디컬’의 강지훈(40) 대표는 한때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경험이 있다. 2005년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한 공기청정기 업체가 2년 만에 문을 닫으면서다. 전셋집 보증금을 빼 사업자금을 충당했고, 가족들은 찜질방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가 재료공학 박사라는 전공을 살려 고기능 소재로 재기하는 데까지는 4년의 시간이 걸렸다.
강 대표는 “신생 창업기업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에 어떻게 실패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비록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경험을 쌓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창업기업의 60% 가까이는 설립 3년이 채 안돼 문을 닫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나마도 전기·전자, 화학 등 제조업의 창업 비중은 5.9%에 불과했고 서비스업이 87.7%를 차지했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패자부활전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혁신적 창업가들의 등장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위험은 많지만 경제에 파급효과가 큰 기술 혁신형 창업은 줄어들고, 음식점 프랜차이즈 등 상대적으로 위험이 낮은 생계형 창업만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번 실패한 기업가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기업가 정신의 후퇴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독 한국에서 창업 실패 부담이 큰 것은 실패에 따르는 부담과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중 전문가들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연대보증이다.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은 “성실한 창업 실패자에 대해서도 연대보증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회수하다 보니 ‘사업 실패=인생 실패’라는 등식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남 회장은 이어 “이런 구도를 깨기 위해선 어렵더라도 창업 자금 형성을 융자가 아니라 투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선 벤처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금융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을 키우고, 기업공개(IPO)나 스톡옵션 등에 대한 규제도 완화하는 게 선결 과제다. 또 아이디어를 사고파는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제품이 아니라 지식재산권을 거래해 돈이 없어 망하는 걸 막아 주자는 것이다.
더불어 실패 경험을 하나의 사회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영달 동국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창업으로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최초 창업의 성공률은 18%에 불과하지만, 재창업의 경우 성공률이 30%에 달한다”며 “숙련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 10억~100억원이 드는 것과 같이 능숙한 기업인이 되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학습 비용, 시행착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 “실패자들이 빠르게 재기하는 사회일수록 ‘창업·성장·쇠퇴·소멸·재창업’이라는 기업 생태계의 선순환이 잘 이뤄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업에 실패하면 ‘패가망신’ 이라는 인식이 커 창업이 활성화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고영하 한국엔젤투자협회장도 “실패한 창업자가 다시 일어 설 수 있고, 실패의 경험이 창업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국도 창업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판 ‘실패 컨퍼런스’ 개최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를 만난 자리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벤처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반영하듯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실패한 벤처1세대 기업가의 재기를 지원하고 나서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실패기업가들에게 족쇄를 채우던 연대보증 제도도 제도권 금융기관에서는 사실상 퇴출됐다. 하지만 정부와 우리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에 처한 기업가를 위해 사전 신고제를 도입, 폐업자를 대상으로 재취업이나 재창업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0월 30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깨고 재도전을 장려하기 위해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이 개최한 ‘2013 재도전 컨퍼런스’가 그것이다. 사업에 실패해 본 사람들이 실패 경험담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이 행사는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실패 컨퍼런스다.
“정에 이끌려 지인이 하던 중국 투자 사업에 무모하게 손을 뻗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중국 투자 환경에 무지했던 탓에 현지 경쟁사와 소송이 걸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요. 2010년 파산 후 3년 간 세금체납과 사업자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올해 실패중소기업인 힐링캠프 교육과 재창업 자금 지원으로 재창업에 성공했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아이알티코리아 유정무 대표는 자신의 실패 경험을 다른 기업인들과 함께 나눴다.
또 이 날 행사에는 개선기업회생분야 전문가인 그레고리 J 파인(美 TMA 회장)과 로날드 R 서스먼(美 TMA 의장)이 참가해, 실리콘밸리 신화를 일군 재도전의 가치와 미국의 구조 조정·회생 정책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우수인력들이 벤처창업에 적극 나서도록 실패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창조경제 실현의 관건”이라며 “이번 컨퍼런스는 ‘한국형 재도전 환경 구축’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단초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언급했다.
얼마나 여러 번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얼마나 여러 번 실패 했으며 그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웠냐가 그 사람의 자산이 되 는 사회.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패’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