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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通

경기도 역사기행 | 양주 해유령전첩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지


 

 

 

▲ 해유령전첩지 전경. 앞에 있는 전각이 1991년 세워진 충현사다. 임진왜란 당시 해유령에서 공을 세운 신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양주 백석읍에서 파주로 넘어가는 자그마한 고갯길 옆에는 10m 높이의 기념탑과 사당이 하나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이 유적은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해유령전첩지’다. 기념비와 자그마한 사당 하나가 전부인 유적이지만, 이곳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해유령전첩지는 임진왜란 최초의 지상전 승전지다. 그리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각(申恪, ?~1592) 장군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더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육군, 최초로 왜군을 섬멸하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 봉화가 올랐다.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 부산포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됐다.
바다에서 왜적을 막아야할 경상좌수영군은 접전도 벌이지 않고 궤멸했고, 다음날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의 약 1만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본격적인 7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밀고 올라왔고,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불렸던 신립(申砬, 1546~1592)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패하고 말았다.
신립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선조는 김명원(金命元, 1534~1602)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한강방어를 명한다. 하지만 김명원은 한강에서 변변히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부원수 신각과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은 양주 산 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 함경도에서 출병한 병사들과 합류한 신각 장군은 서울에서 임진강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왜군을 기다렸다.
신각 장군이 매복한 장소는 지금의 양주 광적면소재지에서 송추CC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도로 좌우로 산이 있어 매복지로는 적격인 장소였다.

신각 장군의 억울한 죽음
5월 2일 한강전투 이후 변변한 저항을 받지 않은 왜군은 조선군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했다. 5월 7일 옥포해전 이후 해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왜군이었지만, 지상전에서만큼은 파죽지세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조선 육군을 몰아붙였다.
2진으로 조선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쫓기 위해 70명의 선발대를 보냈다. 왜군 선발대는 변변한 저항조차 없는 조선군을 크게 얕보고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진군했다.
그들이 신각 장군이 매복하고 있는 곳, 해유령에 이른 것은 5월 16일이었다. 왜군 70명은 조선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했다. 조선 육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신각 장군은 왜군의 수급들과 함께 승전보를 조정에 알린다. 하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전투에서 도망친 이후 문책을 두려워해, 조정에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고 도망하여 전투에서 패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김명원의 말을 믿고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좌의정 유홍(兪泓, 1524~1594)은 참형을 주장했다.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의 참형을 명했다. 선전관이 떠난 후 얼마 지 나지 않아 신각의 승전보가 전해졌고, 선조는 서둘러 참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다시 보냈다. 하지만 중지명령을 전하러 간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 신각의 형은 이미 집행된 뒤였다. 또 신각 장군의 부인 정씨는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자결했다


① 1977년 세워진 해유령전첩비.
② 해유령. 좁은 도로 옆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있어 매복 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이곳에서 신각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임진왜란 최초로 지상전에서 70명의 왜군을 전멸시키며 승전했다.
③ 전첩비 비문.


매년 5월 19일 추모제 열려
해유령전첩지에는 1977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1991년에 충현사가 세워졌다. 매년 5월 19일 충현사에서는 신각 장군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같이 싸웠던 이양원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유령전투 직후 영의정에 올랐고, 신각 장군을 모함했던 김명원은 팔도도원수, 호조·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 이후 좌찬성, 이조 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 봉된 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신각 장군에 대한 이후의 논공행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선조실록에 신각 장군과 관련한 생원(生員) 유숙(柳潚)의 상소가 다음과 같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卒)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군사 전체를 패몰시킨 경우도 은사(恩赦)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 신각 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 신은 전하께서는 이병의 공로를 살피고 신각의 공훈을 생각하여 승급시키고 포증하시며, 또 이광의 죄를 가하여 일국(一國)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를 고무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부인에게는 정조 때에 이르러 열녀문이 세워졌다.


이신덕 기자 l oponce@gfe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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