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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通

역사가 된 기업 이야기 | 이케아(스웨덴)

‘문화’가 된 세계 최대 가구기업
1943년 설립, 저렴하고 합리적인 조립가구의 대명사로 성장



 


▲이케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도발적인 광고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이케아 프랑스점은 지하철역에 이케아 전시 부스를 설치, 사람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마케팅을 펼쳤다. (사진 : I KEA 프랑스)

‘아바(ABBA)’와 ‘볼보(VOLVO)’를 제친 스웨덴 최고의 수출품은 무엇일까? 바로 ‘이케아(IKEA)’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예쁘고 실용적인 가구를 볼 때, 사람들은 ‘이케아(IKEA)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한 회사의 이름이 그 분야에 있어 대명사가 되는 경우는 그 회사가 독보적이고 넘어설 수 없는 위치를 갖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1943년 스웨덴에서 설립된 이케아는 전 세계 가구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화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1943년 이케아 탄생
이케아를 알고 싶다면, 우선 브랜드의 뜻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케아의 I와 K는 설립자이며 최대주주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앞 두 글자, E와 A는 그가 이 가구회사를 만든 지역인 엘름훌트(Elmtaryd) 아군나뤼드(Agunnaryd)의 앞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스웨덴 남부의 가난한 마을 엘름훌트에서 태어난 캄프라드는 1943년, 당시 17세의 나이에 이케아를 세웠다. 한 평도 안되는 창고에서 시작된 이케아는 식탁용 매트, 담배 라이터, 손목시계, 장신구, 나일론 스타킹, 만년필, 지갑, 액자 등 당시 어린 캄프라드가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았다.
1945년 캄프라드는 각개격파식으로 방문판매를 하는 게 버거워지자 지방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임시통신판매 카탈로그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배송 수단으로 지역 우유배달차를 이용했다.
3년 후 캄프라드는 루스라는 이름의 걸상과 커피테이블을 신문에 광고하면서 가구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소파침대와 샹들리에를 추가했고, 이 모두를 ‘이케아 뉴스’라는 통신판매 브로슈어에 수록했다. 가구는 성공적이었다. 캄프라드의 부모와 친척들은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그를 도와야 했다.
“우리는 뛰어난 디자인을 지닌 다양한 제품을 아주 싼 가격에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케아 창업자인 캄프라드는 자신의 자서전 <어느 가구상의 유언>을 통해 합리적 가격정책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1951년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가구회사로 만들기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른 제품은 모두 버리고 대규모 저가 가구에만 주력하기로 한 것. 그는 고객들이 가구를 구매하기 전 직접 만져보고 살펴볼 수 있도록 엘름훌트에 가구 전시실을 마련했다. 단돈 1만3,000크로나(2,000달러)에 구입한 이 전시실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가구를 전시하고 2층에는 가구를 보러 온 고객들에게 공짜 커피와 빵을 대접했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공복으로는 할 수 없다”는 캄프라드의 믿음에 따라 제공됐던 커피와 빵은 이후 성공적인 이케아 식당의 본보기가 됐다. 현재 이케아 매장에서 판매되는 미트볼은 한 해에만 약 1억5,000만개가 팔린다.

플랫팩 가구의 발명
1954년 이케아의 매출은 300만크로나(5억2,000만달러)로 급등했고, 이듬해에는 다시 그 곱절이 됐다. 저가 정책으로 이케아가 승승장구하자, 스웨덴 가구상들은 분노했다. 경쟁사들은 이케아를 보이콧하도록 공급업자들을 압박했다. 스웨덴 가구딜러협회는 이케아에 가구를 공급하는 업체의 제품은 구매하지 않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따라 이케아는 직접 가구를 디자인해 제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이케아 가구의 핵심이자, 이케아가 세계 최대의 가구회사로 성장하는데 있어 발판이 된 ‘플랫팩 가구’이다.
이케아의 젊은 디자이너인 일리스 룬드그렌은 탁자를 자동차 트렁크에 집어넣던 중 공간 절약을 위해 탁자의 다리를 떼어내 상판 아래에 붙였다. 이 우연한 사건을 통해 납작하고 평평하게 포장되고 고객이 직접 조립할 수 있는 ‘플랫팩 가구’가 발명됐다.
스웨덴 안에서 배척당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케아는 폴란드에서 제품을 제조해 스웨덴으로 들여오는 방식을 택했다. 이 때 드는 수송과 보관 비용의 문제를 가구를 납작하게 포장하는 플랫팩 가구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케아는 폴란드에서 제품이 도착하면 완성품으로 조립하는 대신 창고에 보관해두었다가 고객들에게 그 평판 포장 그대로 판매한다. 고객들은 반제품 상태의 가구를 자기 차로 운송해 집에 가서 스스로 조립한다. 이러한 DIY방식은 회사에게는 인건비, 운송비, 창고비 등의 비용 절감을, 소비자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가구를 공급하고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등 일석삼조의 효과로 이어졌다.

혁신을 통한 생산비 절감
이케아 창업자인 잉바르 캄프라드는 필요없는 낭비를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호텔 숙박비가 아까워 차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세계 최고의 가구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한 번도 퍼스트 클래스나 비즈니스 클래스를 탄 적이 없다. 이런 창업자의 절약 정신은 이케아 가구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데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미카엘 올슨 이케아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우리 디자이너들은 3인용 소파의 포장을 이전보다 더 간소하게 하는 방법을 고안했다”며 “새 방법은 이전보다 적재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어 제품가격을 100유로(약 15만원) 인하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케아 직원들은 제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기 위해 매진한다. 이는 무조건 재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품질의 제품을 가장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 중 하나가 한 번도 가구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이색 공급업자들을 활용하는 방안이다. 이케아는 철망 제조사와 계약을 해 쇼핑카트를 만들고, 스키 제조사에서 탁자를, 통조림 캔 공장에서 양철 쓰레기통을 만든다. 또 가격을 낮추기 위해 버려진 재료도 활용했다. 볼보 공장에서 나온 타이어 자투리로 액자를, 고압선 철탑 부품으로 티라이트홀더를 만드는가 하면 닭털을 이용해 이불을 만든다. 어떻게 보면 낭비될 수 있는 재료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케아가 다른 어떤 가구 회사보다도 저렴한 가구를 만들 수 있는 혁신의 힘이다.

독특한 매장 구성
1965년 이케아는 스톡홀름에 매장을 열었다. 이후 스웨덴 전역에 이케아 매장을 오픈한데 이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에서도 잇따라 문을 열었다.
이케아는 전 세계 26개국에서 약 300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이케아 매장은 창고와 전시, 판매가 한 공간에서 동시에 이뤄지는 게 특징이다. 특히 이케아는 종류나 디자인의 다양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케아의 매장은 1만여 종의 제품이 진열된 거대한 쇼룸이다. 이 회사는 고객이 원하는 물건만 집어서 나오도록 품목별로 구분해놓던 기존 가구점 진열방식을 버렸다. 대신에 고객이 매장 전체를 물 흐르듯이 순회한 다음에야 계산대로 나갈 수 있도록 동선을 일방통행식으로 설계했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2층 전시장을 둘러보며 이케아 제품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고, 1층 창고로 내려와 해당 제품을 직접 찾아 구매하는 방식이다. 2층 전시장 곳곳에는 상품 체크리스트와 연필이 구비돼 있어 원하는 상품의 제품번호를 적어놓고 나중에 1층의 창고에서 제품을 찾아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면 된다.
이와 함께 이케아는 매장 내 제품 실험 부스도 운영한다. ‘이케아 제품은 싸고 예쁘긴 한데, 내구성이 떨어진다’라는 소비자들의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매장 내 소형 실험부스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이케아는 제품의 내구성과 강도를 보여주는 테스트를 소비자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다. 또 모든 제품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테스트를 시연하는 제품에 한해서는 10년에서 25년간 무상 수리를 보장함으로써 품질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경영권 승계 논란도
비상장 회사인 이케아는 현재 공식적으로는 네덜란드에 등록된 캄프라드의 공익재단인 잉카재단의 소유다. 이케아는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 조세 피난처 등을 이용하고 복잡한 기업구조를 활용했다. 잉카재단은 이케아 그룹의 지주회사인 잉카홀딩을 지배하고 이케아의 상표권, 제품 디자인 등은 인터이케아시스템스라는 별도 회사가 갖고 있다.
이케아는 이런 복잡한 지배구조를 통해 세금을 절약하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상속세 등으로부터 회사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탈세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 이에 대해 이케아는 절세는 회사의 비용 절감 노력의 일환이라고 반박하며 재정상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는 등 투명성을 높여 비판을 줄이려 하고 있다. 이케아는 가족기업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기업의 대표주자이기도 하다. 이케아는 다른 서구기업들과 달리 아직도 증시 상장을 하지 않고 중요 의사 결정이 창업자 일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폐쇄적 구조를 갖고 있다. CEO 올슨은 “회사는 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맞출 필요가 없이 장기적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가족 경영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올해 나이 87세인 창업자 캄프라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페터(49), 요나스(47), 마티아스(43) 등 캄프라드의 세 아들은 모두 이사회 멤버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누가 경영권을 넘겨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논란에 잉카홀딩의 괴란 그로스코프 회장은 “이케아는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회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케아 안팎의 시선은 여전히 불안하다.
캄프라드는 ‘저렴한 가격과 실용성 있는 디자인’이란 마케팅 전략을 통해, 이케아를 매출 276억유로(약 40조원)에 약 13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가구회사로 키웠다.
98년에는 중국에 진출했고 지난해 6월에는 인도 당국으로부터 15억유로를 투자, 25개 매장오픈을 허가받았다. 한국에도 오는 2014년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1호점을 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이케아는 오는 2020년까지 매출을 85%가량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이케아는 지난해 2020년까지 연매출을 269억유로에서 450억~500억유로(588억~653억달러)로 끌어올리고 매장 수도 현재 300개에서 500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이케아는 오는 2014년까지 매년 15억~25억유로를 투자하고 2020년까지 직원 2,000명을 추가로 고용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이케아 직원 수는 약 13만1,000명이며 한 해 약 6억5,500만명의 고객이 매장을 찾고 있다.

이미영 기자 l misaga@gfe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