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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通

경기도 역사기행 | 고양 행주산성

행주치마에 담긴 민초들의 호국정신
고양 행주산성

 


▲행주산성 정상부에는 행주대첩을 기리는 두 개의 전적비가 있다. 앞의 전각에는 1602년에 세워진 전적비가, 뒤편의 대형 탑은 1963년 건립된 전적비다.

서울 북쪽 행주대교 맞은편 작은 언덕 정상에는 높이 솟은 탑이 하나 있다. 행주대첩의 승리를 알리는 전적비다. 흔히 산성하면 남한산성처럼 돌로 단단히 쌓은 성을 떠올리게 되지만, 행주산성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다. 입구를 지나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권율 장군 동상이 있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충장사와 토성을 알리는 안내 푯말이 나온다.
토성은 행주산성의 내성을 감싸고 있는 성곽으로 그냥 흙으로 가파르게 쌓아 놓은 언덕의 느낌이 강하다. 특별히 산성 내에서 전투의 흔적을 찾아보거나, 격전 지다운 험난한 지형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단지 한강과 서울을 굽어보는 방향의 산세가 제법 험하다는 정도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1593년(선조 26년) 2월 권율 장군을 중심으로 한 1만여명의 조선군이 3 만명이 넘는 왜군을 맞아 이곳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권율은 이 전투의 승전으로 말미암아 도원수가 됐다.
당시 처절했던 순간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6권>에 자세히 수록 되어 있다.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 (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000여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 (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 중략 …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 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 출처: 한국고전번역DB(http://db.itkc.or.kr)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마지막에는 화살이 떨어져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치마폭에 돌을 날라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행주치마의 유래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충장사는 권율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1970년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세워졌다.

임진왜란으로 유명해진 행주산성은 원래 삼국시대에 축성됐다. 옛 수도 한양을 감싸는 외사산 서쪽 덕양산 능선에 축조된 이 성은 토축과 석축이 혼합되어 있고,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과 북쪽으로 펼쳐진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도 산허리에는 목책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 어골문, 수지문 등의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임진왜란 격전지의 기억만으로 행주산성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산성이 지닌 아름다움에 반한다. 한강가의 돌출된 산봉우리에 건축된 행주산성은 서해바다로 흘러드는 한강을 조망하기에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에 이르는 성곽길은 여유로운 산책로로 그만이다.
현재 이곳에는 1602년에 세워진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다. 1970년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성역화 됐고,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와 정자, 문 등이 세워졌다. 행주산성은 사적 제56호로, 지정면적 36만1,171㎡, 둘레 약 1㎞ 규모다.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5월, 치열했던 호국의 현장을 되밟아 보며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①권율 장군 동상. 행주산성 입구 바로 뒤편에 세워져 있다. ②행주산성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서울. ③삼국시대에 조성된 행주산성은 대부분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이다. 그냥 산책길을 만들기 위해 쌓은 언덕길처럼 느껴진다.


이신덕 기자 l oponce@gfe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