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通

경기도 역사기행 | 김포 손돌목

염하에 담긴 민초의 우국충정
김포 손돌목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염하의 가장 좁은 길목인 손돌목. 왼쪽에 보이는 성곽은 광성보다. 옛 해상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요충지였던 손돌목은 지금도 철책선 너머로 봐야한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물길의 이름은 염하(鹽河)다. 바다지만 마치 강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길은 국난을 당했을 때 요긴한 방어선 구실을 했다. 섬과 육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해협이지만, 북쪽으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물길이 만나 수위가 높고 반대로 남쪽은 낮아 유속이 아주 빠른 것이 특징이다. 염하는 예부터 중요한 해상교통로였다. 거센 물살 때문에 사고도 잦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세곡선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들어와 한양으로 갔다.
또 잘 알려진 대로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도 했다. 강화도가 커다란 성이라면 이 물길은 적이 성을 공격하기 어렵도록 주위를 파, 물로 채운 해자(垓子)의 역할을 한다.

음력 10월 20일에 부는 찬바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곳은 외세의 침략을 막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의 역할을 했다. 염하 양편으로 들어선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은 대표적인 유적지들이다. 조선 말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도 이곳이었다.
길이 약 20㎞에 이르는 염하는 폭이 넓은 곳은 1㎞가 넘고 좁은 곳은 불과 200~300m에 이를 정도로 좁다. 김포의 덕포진 앞에는 염하에서 폭이 가장 좁고 물길이 S자로 휘어지는 곳이 있는데, 이 곳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화의 광성보와 김포의 덕포진 사이의 이 좁은 물길의 이름은 ‘손돌목’이다. 조선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에는 염하에 부는 ‘손돌풍’에 대한 기록이 있다. 매년 음력 10월 20일에는 이곳에 거세고 찬바람이 불고 추위가 심해지는 데, 이곳 사람들은 이를 ‘손돌바람’ 혹은 ‘손돌추위’라고 부른다는 것.


▲손돌공 묘지는 1970년대 마을주민들이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일제시대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손돌공 사당과 묘지가 있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지기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죽으면서도 왕을 생각하다
손돌은 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 1232년 고려조정은 몽골의 2차 침략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를 하게 됐다. 당시 천도길을 안내한 사람이 바로 뱃사람 손돌이었다. 손돌은 험한 물길을 따라 배를 몰아갔는데, 지금의 덕포진 부근에 이르러 갑자기 물길이 좁아지고 앞이 막히자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뱃길을 바로 잡으라고 명했다.
손돌이 물길을 설명하고 안심시키고자 했지만, 몽골의 침략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고종은 의심을 가득 품은 채 손돌이 흉계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고종은 그를 참수하라고 명했고, 손돌은 죽기 전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워 떠내려 가는대로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고 충언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가 시키는대로 해 무사히 피난하게 된 고종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그가 죽은 곳 인근, 지금의 손돌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그의 묘지와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후 그곳의 이름을 손돌목이라고 부르게 됐다.
손돌의 사당은 일제시대 때 파괴되었다. 사당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지기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의 손돌묘는 197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새롭게 복원했고, 손돌공 진혼제도 다시 드리고 있다. 손돌공 진혼제는 1983년 제2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공연대회에 참가해 최우상을 수상했고, 1984년에는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덕포진과 대명항
손돌공의 묘지는 덕포진 포대에서 만날 수 있다. 김포에서 강화 초지대교로 가는 길목, 대명항에 못미쳐 덕포진 포대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가면 덕포진 입구가 나온다. 시골길이라 초행길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넓은 주차장과 함께 덕포진전시관 옆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앞으로 염하와 강화도가 보이는 공원과 마주하게 된다. 오른쪽 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덕포진 포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고, 아래로 깨끗하게 단장된 가포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포대를 지나 해안길을 걸으면 다시 나포대가, 그리고 다시 좀더 오르면 다포대가 나온다. 다포대에서 언덕 위로 각 포대에 불씨를 공급했던 파수청터와 손돌공의 묘가 보인다.
손돌공의 묘지가 있는 곳은 덕포진 돈대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강화의 광성보와 그 앞 손돌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 손돌목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다. 6·25이후 염하는 민간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가, 어선의 통행은 2007년이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여전히 염하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덕포진포대와 손돌목을 돌아봤다면, 바로 인근에 있는 대명항을 찾아 김포함상공원과 대명항 수산시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①대명항에 있는 김포함상공원은 2006년 퇴역한 해군 운봉함을 이용해 만들어진 군사공원으로, 우리 해군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②덕포진 포대는 현재 총 15포대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가, 나, 다 세 개의 포대로 나뉘어져 있다. 사진은 가포대. ③ 파수정은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보관하던 곳으로 현재는 건물터만 남아 있다.


이신덕 기자 l oponce@gfe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