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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通

Movie &

도둑질의 정의
<로빈 후드>, 1991

 



로빈 후드의 영화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922년도 알랜 드원 감독의 작품을 필두로, 최근에는 용과 마법이 나오는 로빈 후드까지도 등장한 바 있어 관련 작품만 무려 30여 편에 이른다. 국내 극장에서 개봉한 가장 최근작으로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10년도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원래 2편 이상으로 기획된 것이어서 실제 로빈 후드의 활약상을 그렸다기보다는, 로빈 후드가 ‘의적’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활을 무척 잘 쏘는 로빈 후드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강렬해서, <그린 애로우> 등 현대판 슈퍼히어로물 등을 통해 변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로빈 후드>의 설정과 관련해 한 가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도둑질이 정의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는데, 왜 로빈 후드는 법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가?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첫 번째로는 “과연 정말로 악법도 법인가?”라는 질문이고, 두 번째로는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이다.
우선 두 번째 고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살던 고대 그리스는 (귀족들만의 것이긴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를 지지하는 기틀은 결국 모두가 동의하는 ‘질서’다. 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봐야 한다. ‘악법도 법’이라는 선언은 결국 사회 질서를 지켜가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선택이었다.
로빈 후드의 시대는 다르다. 이 사회의 법이라는 것은 결국 영주의 기호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두의 동의’라는 정당성을 갖지 못했다. 초야권(새로 결혼하는 신부의 첫날밤을 영주가 가질 수 있 는 권리) 등이 ‘모두의 동의’를 거쳤을 리 없다. 이런 사회에서 ‘악법도 법’이라고 받아들이는 행위는 결국 지배 권력의 오만과 횡포를 공고히 할 뿐이다. 로빈 후드의 저항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대답할 수 있게 됐다. ‘악법’도 분명히 ‘법’이긴 하다. 그러나 그 ‘법’이라는 것이 인류가 갖는 보편적 이성과 합치하는가의 문제가 다가온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라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이성이 모두 동의하기에 법으로 문장화된 경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그 법이 보편적 이성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다행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보다도 훨씬 자유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악법에 따를 수밖에 없긴 하지만, 대신 위헌 심판이나 국민투표 등을 통해 소시민도 얼마든지 악법과 싸워나갈 여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과거처럼 의적질을 하거나, 법에 대항해 투쟁을 부르짖을 필요가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악법이 있다고 해서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변혁과 진보가 가능하다.
“법은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라는 칼 마르크스의 선언은 130년 전에 나온 것이고, 그 유효기간은 지났다. 현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것은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악습(관료제, 권위주의, 이념 등)에 빠진 썩어빠진 정신이다 .


자유기고가 홍훈표 l exom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