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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通

Movie & | '혹성탈출', 2010

이종(異種) 간의 사랑은 가능한가?


 


1968년 개봉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혹성탈출>의 반향은 엄청났다고 한다. 관객들은 낯설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원숭이 행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드러나는 엄청난 반전은 관객들의 온몸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에서 인간들은 철저히 (진화한) 원숭이들의 관찰 대상이다. 인간들은 너무나 미개해서 언어조차 모른다. 요새와는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2001년 팀 버튼 감독을 필두로 리메이크되기 시작한 <혹성탈출>은 2011년 <진화의 시작> 편이 크게 흥행하면서 차기작이 준비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팀 버튼 감독의 영화는 흥행 면에서 거의 실패하다시피 했다. 그 이유를 필자는 영화를 보고 불쾌했을 사람이 꽤 많았을 거라 짐작 해봤다. 바로 주인공을 맡은 마크 월버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암컷 원숭이 박사 때문이다.
원작에서 암컷 원숭이 박사는 찰톤 헤스톤을 ‘동정심’으로 바라 본다. 마치 우리 인간들이 실험에 사용되는 개나 침팬지를 보면서 갖는 그런 동정심이다. 반면 팀 버튼 작에서 암컷 원숭이가 주인공에게 갖는 감정은 거의 ‘애정’에 수렴한다. 이런 점이 관객들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상업주의가 낳은 명백한 실패다.
이제 생각해 보자. 과연 이종(異種)간의 사랑은 가능한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이런 설정은 말도 안된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외계인과 지구인의 사랑을 다루기도 하는데,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왜’ 불가능할까? 이렇게 얘기가 나오면 이제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뤄야 할 이유가 생긴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 일까?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은 ‘사랑’에 대해 종족 혹은 유전자 번식의 욕구가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異種) 간의 사랑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생각해 본다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선뜻 수긍하기도 겁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사랑을 그렇게 싸구려 취급하기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한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숭고한 감정으로, 우주 본연의 진실이라고 보니 말이다.
결국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사랑의 범위’가 아닐까 한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의 사상 중 하나를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맹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제일 먼저 가족을 사랑(100 정도)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80 정도)한다. 그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사랑의 동심원’이 퍼져나가는데, 멀리 퍼져 나갈수록 그 농도는 얕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1 정도로 약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기는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유지 기반이다.
이 생각을 그대로 확장시키면 이 글에서 제시하는 논쟁의 실마리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 존재의 ‘사랑의 동심원’은 인간끼리 제일 강할 테다. 하지만 그 동심원은 실상 더 멀리 퍼져 나가서 다른 동물에게까지도 뻗쳐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의 농도는 꽤 약해서 서로 ‘애정 및 성욕’이란 감정을 갖기는 힘들다. 그래도 사랑이기는 하다.
솔직히 “사랑은 숭고한 우주 본연의 진리”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자유기고가 홍훈표 l exom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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