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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通

[연천 역사기행]숭의전지, 고려 오백년 오롯이 담긴 역사의 현장

수원에서 연천 숭의전지(崇義殿址)까지는 무려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100㎞ 조금 넘는 거리였지만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벗어나 의정부와 양주, 동두천을 거쳐 가는 길은 시간을 더디게 했다.
연천 전곡리 선자유적지를 지나 미산면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삼화교를 건너자 왼쪽으로 숭의전 안내표지가 나왔다. 한적한 시골도로가 잠시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홍살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연천 숭의전지였다.

<숭의전지 전경. 바로 앞 절벽 아래로 임진강이 흔른다.>

홍살문 앞으로 도로를 따라 길게 주차장이 보였다. 홍살문 앞으로 약수터가 눈에 들어왔다. 길옆의 약수터는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약수터 옆에는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자그마한 비석이 서 있었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마셨던 우물이란다. 당시 이곳 숭의전 자리에는 앙암사(仰巖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어수정(御水井).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송도를 오가는 길에 쉬면서 물을 마셨다는 우물.>

고려 태조 왕건 신위 모셔
앙암사는 고려 태조의 원찰이었다. 숭의전은 그 자리에 세워졌다. 숭의전은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해 현종, 문종, 원종 등 고려의 4왕과 복지겸, 홍유, 신숭겸, 강감찬 등 고려조의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숭의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태조 6년인 1397년이었다. 당시 앙암사가 있던 자리에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였다. 숭의전을 감싸고 도는 임진강 상류에는 ‘썩은소’라는 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조선이 개국되고 나서 위기에 몰린 왕 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성(姓)을 바꾸고 피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일부 왕 씨들은 태조 왕건의 신주를 안전하게 옮기기로 뜻을 모으고 돌로 만든 배에 신위를 싣고 송도 앞 예성강을 떠났다. 그 돌배가 도착한 곳이 지금의 썩은소였다. 왕 씨들은 돌배를 쇠로 만든 닺줄에 매어 놓고 사당 지을 자리를 물색해 정하고 돌아가 보니 배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쇠로 만든 닺줄은 썩어 끊어진 상태였다. 놀란 이들이 배를 찾아 하류로 내려가 보니 배는 누에머리(蠶頭)라는 절벽아래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절벽 위에 사당을 지었는데 바로 숭의전이다. 썩은소란 이름은 하루사이에 쇠닺이 썩어 끊어졌다고 해 ‘썩은쇠’라고 불리던 것이 차츰 소리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제례 때 사용되는 향, 축,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인 앙암재.>

지금도 봄,가을 두 차례 제례 봉행
전설의 우여곡절만큼이나 숭의전도 많은 풍상을 겪었다. 보통 새 나라가 개국되면 이전 나라, 즉 전왕조의 시조나 대제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평양의 숭령전, 혁거세왕을 모신 경주의 숭덕전, 탈해왕을 모신 숭신정, 온조를 모신 충남 직산의 숭렬전 등이 그 사례들이다.
숭의전도 그런 전례를 따른 것으로, 1397년 사당 건립 후, 정종 1년, 1399년에는 태조를 비롯해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세종 7년, 1425년에 조선의 종묘에 5왕을 제사하는데 8왕은 합당하지 않다고 해 태조를 비롯한 4왕만을 봉향토록 바꾸었다. 문종 1년인 1451년에 비로소 숭의전이란 이름을 짓고 고려 4왕에 16명의 충신을 함께 배향했고, 1452년에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찾아 부사를 삼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숭의전 제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는 개성왕씨종친회와 숭의전보존회 주관으로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봉행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해두는 곳이다.>

왕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무상함
홍살문을 지나 언덕길을 구비 돌면 탁 트인 임진강을 앞에 둔 숭의전이 보인다. 5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숭의전은 길에서부터 차례로 앙암재, 전사청, 숭의전, 이안청, 배신청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제례 때 사용되는 향, 축,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인 앙암재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해두는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과 출입문을 가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 4왕의 위패를, 배신청은 고려 16공신의 위패가 봉향되어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이안청은 숭의전을 청소하거나 공사할 때 잠시 위패를 모셔놓는 공간이다.
현재 숭의전지는 5개의 부속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6.25 이후 불탄 것을 새롭게 재건한 것이다.
원래 기록에 따르면 숭의전은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해져 현재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숭의전지 일대는 다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숭의전 동쪽에는 임진강에서 수직으로 솟은 봉우리인 잠두봉이 있다. 이곳 바위 절벽에는 정조13년(1789년) 마전군수(지금의 연천군 미산면)를 역임했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지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그가 노래했던 옛 왕조 고려의 영화와 쇠락의 무상함은 조선을 거쳐 지금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그가 느꼈던 고려 왕조의 무상함이 우리에게는 조선 왕조의 무상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역사는 그렇게 흐르나 보다.

글|이신덕 기자 사진|김영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