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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通

60년대 폭탄주, '활명수 칵테일' 들어보셨나요?

동화약품 ‘까스활명수’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113년간 1등 소화제
연매출 400억원… 브랜드 차별화 전략으로 최장수 상품 명성

국내 소화제의 대명사인 동화약품의 ‘까스활명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이자 신약으로, 113년 전인 1897년에 탄생됐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까스활명수는 약 80억병 이상이 판매됐다. 이 수치는 전세계 인구 약 65억명이 1병 이상을 마시고 남을 수량이며 대한민국 국민 4,700만명이 1인당 170병씩 마실 수 있는 수량이다. 국내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와 등록상품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


지금도 활명수는 연간 1억병 생산에 연매출 400억원,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는 소화제 부문 1등 제품이다.

활명수는 한말 궁중의 선전관(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던 무관 직책)이던 민병호 선생에 의해 탄생된다. 당시 맵고 짠 음식을 급하게 많이 먹는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급체나 토사곽란(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 병) 등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민병호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에 대한 지식을 두루 익힌 뒤 소화불량, 위장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7년 활명수를 개발했다. 약이라고는 달여 먹는 탕약만 존재했던 터라 병에 넣어 휴대하기 쉽게 한 활명수가 생산되자마자 당시 백성들은 만병통치약 또는 제품명 그대로 ‘생명의 살리는 물’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개발된 활명수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체제에 들어가 대한민국 제약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13년이 지났지만 아선약, 육계, 육두구, 건강,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 등 11가지 순수생약성분으로 제조되는 방식은 지금도 동일하다. 다만 기존 성분에 청량감을 보강하기 위해 탄산가스를 첨가, 1966년 ‘까스활명수’, 1989년 ‘까스활명수-큐’로 이어졌다.

까스활명수는 그 오랜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1910년엔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 활명액(活命液), 생명수(生命水) 등 60여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했으며, 1990년대까지도 활명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유사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어느 누구도 활명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부채표 캠페인으로 브랜드 차별화에 나서며 소비자들의 신뢰를 강화함과 동시에 소화제의 대표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져 대한민국 국민이면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소비층을 젊은층 중심으로 대상을 넓히고 브랜드 가치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엔 그동안 회사 내부에서만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까스활명스 이야기’를 만들어 ‘112년된 소화제’, ‘왕들도 마시던 소화제’,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소화제’ 등의 내용을 광고해 단순한 소화제가 아닌 가치 있는 브랜드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수진 기자 ksj@gfeo.or.kr

‘활명수 칵테일’ 들어보셨나요?

1960년대, 당시엔 소주업계의 판매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진로소주 영업판촉팀은 전국 술집을 다니면서 진로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일명 ‘활명수 칵테일’ 전략을 구사해, 인기를 끌었다. 활명수 칵테일은 소주의 쓴 맛을 없애주고 소주의 색깔을 노랗게 해서 마치 양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활명수 칵테일’ 제조방식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당시 주당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