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通

<이끼> 윤태호 만화가가 전하는 스토리텔링 비법은?

부실공사로 인한 건물 붕괴로 아버지를 잃고 부정부패, 썩은 정치 등 사회의 잘못된 현실에 분노해 테러리스트가 된 김현부터 사소한 정의감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고도 또 다시 산골 벽지에서 아버지 죽음의 배후를 파고드는 집요한 인간 류해국, 프로 바둑기사 입문에 실패한 후 종합상사의 인터사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장그래까지. 성격은 물론 시대, 활동배경, 장르 등이 모두 제각각인 이 세 캐릭터의 공통점은 만화가 윤태호의 손끝에서 탄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난 1999년 청소년 만화 ‘야후(YAHOO)’로 문화관광부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윤태호 만화가. 하지만 그의 이름이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08년 포털사이트 미디어 다음에 연재된 웹툰 ‘이끼’의 흥행과 영화화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이끼’(2010년ㆍ340만명)는 웹툰 원작 영화 사상 처음으로 관객 3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형 스릴러 만화의 최고로 꼽히는 ‘이끼’에 이어 직장인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최근작 ‘미생’까지, 내놓는 작품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만화계의 마이더스 손으로 떠오른 윤태호 만화가. 과연 그의 이야기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지난 7월 18일 하남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열린 경기창조콘서트에서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3년간의 긴 슬럼프, 성공의 밑거름

“1999년부터 5년 동안 만화잡지에 ‘야후’를 연재했어요. 단행본만 20권인 만화였는데 이를 끝낸 후 3년 간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려야 했죠. 만화를 그리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는 인터넷 죽돌이 생활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윤 작가는 자주 들어가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어떤 글에 주목했다. 단돈 4,000원 때문에 파출소에 끌려갔다가 합의가 안돼서 경찰서로, 나중에 검찰까지 가야 했던 한 남자가 올린 글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부당한 처우를 바로 잡기 위해 홀로 경‧검찰과 싸웠던 모든 과정을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했다. 긴 싸움의 결과, 검찰부터 경찰까지 그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단돈 4,000원에서 시작된 긴 싸움. 거대한 권력기관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실직과 이혼이었다.

윤 작가는 “사소한 정의감에서 시작된 싸움이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파고드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 후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어요. 단돈 4,000원에서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그는 직장생활도 가정도 모든 것을 잃었죠. 저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더 이상 도시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를 시골로 내려보내자. 어떻게 보낼까. 아버지를 죽이자.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기 위해 시골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마을에 흐르는 음흉한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알아 챈다.

이끼의 주인공인 류해국의 캐릭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죽음에서도 효도심이 아닌 부당함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으로 집요하게 접근하는 주인공. 만화 이끼가 탄생한 것이다.

윤 작가는 “3년 동안 만화를 그리지 못하다 보니깐 어떤 만화라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아이의 아빠인 만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죠. 그렇게 만화 구상에 대해 편집자와 얘기하던 중에 갑자기 음습하면서도 서늘한 ‘이끼’라는 제목이 떠올랐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긴 슬럼프를 겪다보니깐 어느 때부턴가 머리 속에 팍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있었어요. 그 아이디어들이 모두 이끼의 구성 요소가 됐죠. 긴 슬럼프가 있었기에 이끼를 쓸 수 있었던 거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스토리텔링의 시작은 ‘사람’

“결국 이야기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후배가 될 학생들에게 공개한 윤 작가의 스토리텔링 비법.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몰두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독자들은 만화 속 주인공을 통해 전쟁을, 혹은 연애를, 더 나아가 우주까지 체험할 수 있죠.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게 스토리텔링의 시작이에요. 그렇게 캐릭터가 창조되면 이야기는 그들이 끌고 나가는 거죠”라고 설명했다.

캐릭터를 설정한 후 그 캐릭터에 대한 객관적인 히스토리를 작성하는 게 스토리텔링의 시작이라고 윤 작가는 말했다.

“흔히 캐릭터를 기획할 때 캐릭터의 능력부터 설정하는데 나는 반대로 약점부터 설정해요. 이와 함께 이 캐릭터가 어느 도시에 살고 학교는 몇 학년 몇 반인지, 서클활동은 어떤 것을 하는지, 학교를 졸업했다면 졸업년도와 형제관계, 직업 등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설정하죠.”

윤 작가는 캐릭터 한 명당 5~6장의 히스토리를 작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묘사하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이력서를 작성하듯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단어만을 사용해 캐릭터를 정의한다.

 

이야기 배경의 이미지화

캐릭터가 설정됐다면 이젠 이야기의 배경을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작가가 충분히 이미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윤 작가는 강조했다.

“이끼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곳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옆의 한 마을이에요. 고향을 가기 위해서 항상 이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우연히 어마어마한 고속도로 소음벽에 가려져 있던 그 마을을 발견했죠. 이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터널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것이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끼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마을로 돌아가면서 마을의 입구인 굴을 통과하는 컷이 그렇게 탄생했죠.”

그냥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레와 지렁이, 짐승의 부산물 등이 뒤엉킨 음흉한 마을. 윤 작가는 상상 속 마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실사의 마을 사진을 항상 책상에 붙여놓고 이미지화했다.

 

기본기를 바탕으로 매력 어필해야

“흔히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기본기만으로는 데뷔할 수 없어요.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분명히 있어야 하죠. 작가의 매력이 독자에게 어필되는 순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에요.”

윤 작가는 기본기가 없어도 매력만 있다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기가 중요한 이유. 윤 작가는 슬럼프가 왔을 때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기준점이 기본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만화를 그리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위치를 놓치고 헤매는 경우가 생겨요. 슬럼프에 빠지게 된 거죠. 이 때 기본기가 없다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져요. 내가 헤매는 이유의 지점을 말해주는 게 기본기이기 때문이죠. 기본기가 없는 사람은 슬럼프가 왔을 때 최악의 경우 다음 작품을 이어갈 수 없게 돼요.”

만화가에게 기본기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면 기본기에 대한 강박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게 윤 작가의 주장이다.

“기본기를 충실히 다져야 해요. 그렇게 기본기를 다졌다면 기본기에 함몰되지 말고 이를 뛰어넘는 자신만의 매력을 만드세요. 창작이란 결국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닌 독자들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에요.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매력을 만들어야 해요.”

 

 

Tip on 윤태호

1969년, 전남 광주 출생. 1988년 허영만, 조운학 화백의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입문, 1993년 <비상착륙>으로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야후>, <이끼> 등이 있다. 현재 포털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미생>이라는 웹툰을 연재 중이다.

2010년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만화부문 대통령상

2008년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 <이끼>

2007년 대한민국출판만화대상 우수상 <이끼>

2002년 대한민국출판만화대상 <로망스>

1999년 문화관광부 오늘의 우리만화상 <야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