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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通

벌금도 감수한 나이키(Nike)의 신개념 마케팅 전략은?

나이키(Nike)
누구나 신고 싶어 하는 명품 스포츠화
마이클 조던․타이거 우즈 등 스타마케팅 대 성공, 전세계 직원 3만여명

학창시절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신어보고 싶은 신발이 있다. 바로 나이키 운동화. 지금도 미국의 시골학생들은 도시를 방문하면 거의 습관처럼 나이키타운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새로 나온 나이키 제품을 사들인 다음 시골로 돌아가 자신의 나이키 신상을 맘껏 뽐내는 것. 나이키를 사고 싶어도 못 사는 학생들은 짝퉁 나이키로 눈을 돌린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본 사람들이면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형사 송강호가 연쇄살인범 용의자로 정신장애자 백강호에게 나이키 신발을 선물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신발은 나이키(nike)가 아닌 나이스(nice)였다. 이처럼 나이키의 열망이 짝퉁 나이스를 낳은 것처럼, 나이키는 지금도 스포츠 운동화의 명품으로 통한다.

육상선수를 위한 신발

나이키의 창업주 필립 나이트(Philip Knight)는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변호사이자 신문 발행인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리건대 경영학과를 들어갔는데, 마침 이 학교는 미국에서 육상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나이트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육상선수로 활약하며 1마일(약 1.6㎞)을 4분 10초에 주파하는 등 최고기록을 내기도 했다.

1959년 나이트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비즈니스스쿨로 진학한다. 재학 중 아시아 지역 운동화 제조업의 잠재력에 관한 마케팅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논문을 위해 1962년 일본으로 날아간다. 일본 운동화제조업체인 오니츠카 타이거(Onitsuka Tiger 아식스의 전신)를 방문해 운동화 품질과 저렴한 생산원가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오니츠카와 계약을 맺어 미국 내 서부 13개주의 배급업자가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이트는 그의 육상팀 코치였던 빌 보어먼(Bill Bowerman)과 500달러씩을 출자해 블루리본스포츠(Blue Ribbon Sports:BRS)라는 회사를 세우고 오니츠카의 신발을 한 켤레당 3.33달러에 200켤레를 주문했다. 나이트와 보어먼은 오니츠카 운동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6.95달러에 판매했다. 그러나 첫해 매출은 8,000달러, 신발로 벌어들인 이윤은 250달러에 불과했다.

와플기계서 얻은 러닝화

그러나 나이트는 육상선수로서 만족할만한 운동화를 얻고 싶었다. 당시 운동화는 타이어 회사가 만드는 게 보편적이어서 신발을 신고 5마일 정도 달리면 발에 피가 날 정도로 품질이 나빴다.

한편 보어맨은 자기 선수들의 기록을 몇 분의 1초라도 단축시키기 위해 직접 신발을 제작하곤 했다. 1971년 어느 날 보어먼은 아내가 와플을 굽고 있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보어먼은 와플 틀에 약간의 고무를 집어넣고 고무 밑창을 구워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잘라 신발 밑창에 아교를 발라 접착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코치하는 팀의 선수들에게 신발을 나누어주고는 뛰어 보라고 시켰다. 의외로 선수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기록이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탄력이 우수해 발의 피로감까지 훨씬 줄여 줬다.

이를 바탕으로 1972년 ‘달 신발(Moon Shoe)’이 제작, 판매됐다. 와플 무늬가 달에 남은 발자국 모양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졌다. 이 신발로 나이키는 300만달러를 벌어들이면서 1970년대의 가장 혁신적인 신발 제조업체로 명성을 높였다.

이때 나이트의 친구인 제프 존슨은 페르시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던 그리스 병사가 기도를 올린 여신 ‘니케’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나이키’로 회사명을 바꿀 것을 제안했고, 나이트는 곧 회사명을 나이키로 바꿨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한 나이키의 엠블럼은 1971년 미술 대학원생 캐럴라인 데이비슨(Caroline Davidson)에게 단돈 35달러를 주고 만들었다고 한다. 한눈에 나이키임을 알 수 있는 승리의 브이(V)자를 부드럽게 눕힌 것으로 이 로고는 스우시(swoosh 휙~ 하는 소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1972년 나이키는 서브브랜드인 코르테즈 운동화를 육상선수들에게 신겨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1979년 나이키는 미국 러닝화 시장의 50%를 장악했다.

벌금 물고 신게 한 에어조던 대박

1980년대 조깅이 시들해지고 다른 스포츠들이 인기를 얻어갔다. 얼마 후 에어로빅 붐에 편승한 리복(Reebok International Ltd.)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자 나이키는 스포츠 종류에 따라 신발을 다양화함으로써 리복을 공략했다.

나이키는 미국 젊은이들이 스포츠 영웅에 열광하고 도전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에 주목, 스포츠 스타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농구가 최고로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특히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은 거의 농구의 신으로 십대들에게 추앙 받았다. 나이키는 세계적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을 위하여 ‘에어조던(Air Jordan)’이라는 운동화를 디자인하였고, 조던에 의한 나이키의 광고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사실 빨강과 검정이 어우러진 에어조던은 경기에 신고 나갈 수 없는 신발이었다. NBA에서는 검은 신발을 신는 것이 규칙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키는 조던에게 벌금을 물더라도 나이키 신발을 계속 신으라고 했다. 한 게임당 1,000달러의 벌금을 내며 조던은 에어 조던을 신고 경기에 출전했다. 조던이 활약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에어 조던을 갖고 싶어 했다. 그 결과 그 해에만 무려 1억 켤레가 팔리는 등 나이키의 매출은 4배나 껑충 뛰어 올랐다.

이렇게 세계 최대 스포츠 브랜드로 발돋움한 나이키는 1980년 2억7,000만달러, 1986년엔 10억달러, 1999년엔 99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타이거 우즈로 글로벌 브랜드 도약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의 성공을 거울삼아 육상, 배구, 골프 등의 분야에 차례로 적용시키며 각각의 분야를 공략해 나갔다. 이 반복 공식은 가장 진입하기 어렵다는 골프 분야에서도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내세워 ‘Just Do It!(바로 지금 시작하라)’란 광고를 내보내면서 나이키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각인시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 선수들의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나이키는 미국 농구팀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있었는데, 선수들의 유니폼은 나이키가 아닌 다른 경쟁사의 유니폼이었던 것.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미국 국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시상대에 올랐다.

제품 이미지를 끊임없이 혁신하는 나이키의 열정은 ‘아이팟 스포츠 키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나이키가 애플사와 손잡고 개발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이 키트가 들어간 운동화를 신고 달리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은 물론 신발을 통해 온갖 운동 데이터가 집계된다.

1998년 나이키는 푸마와 아디다스 등 경쟁사에 뒤처지며 두 번째 위기를 맞기도 했다. 또 인도네시아 같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이란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이키는 사회적 환원을 꾸준하게 하고 있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나이키는 2007년엔 매출액 기준 160억달러를 벌었으며 2008년 기준 전세계에 3만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김수진 기자 ksj@gfeo.or.kr


<추억의 브랜드>
태화고무㈜ 말표신발


태화고무㈜ 말표신발은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저 신발 브랜드다. 1947년 태화고무공업사는 말표 고무신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말표 고무신은 시장표 그 어떤 고무신보다 품질이 좋았다. 때문에 가격 또한 최고로 비쌌다. 서서히 고무신 시대가 저물고 운동화 시대로 들어서는 1970년 태화고무공업사는 태화고무㈜로 조직을 변경하고 말표 신발을 출시했다. 1년을 꼬박 신어도 떨어지지 않던 그때 그 시절 신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의 대표 운동화 브랜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