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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通

세상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섹시한 명품의 탄생

1993년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패션쇼에서 탑 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높이가 무려 40cm나 되는 구두 ‘모크 크로크’를 신고 런 어웨이를 걷다 넘어졌다. 이때 생긴 유행어가 ‘킬힐(Kill heel) 바이러스’다. 어딘가 과장되게 부풀리고 마음대로 재료를 주물러 입체감을 살린 옷과 신발, 그러면서도 섹시와 파격을 잃지 않는 그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게 바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다. 파격적이고 섹시한 옷을 만드는 데에는 어떤 명품도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따라 오지 못한다.

파격·도발·섹시의 대명사

1941년 영국 더비에서 태어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30살이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주부이자 학교 선생님이었다. 공장 근로자 딸로 태어난 웨스트우드는 17살이 될 때까지 미술책이나 영화 구경 한번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패셔너블한 펜슬 스커트 타입으로 개조해 입거나 당시 유행하던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 스타일의 롱 드레스를 만들어 입는 등의 재능을 발산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패션을 공부했지만 ‘나 같은 노동자 출신은 예술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한 학기 반 만에 학교를 그만둔 후 초등학교 교사의 삶을 선택했다. 1962년 그녀는 21살의 나이로 댄스홀 매니저였던 데레크 웨스트우드와 결혼했는데, 결혼 3년만에 예술학교 학생이던 말콤 맥라렌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전 남편과 맥라렌 사이에서 얻은 아들 둘을 키우며 교직생활을 계속하던 웨스트우드는 맥라렌의 제의로 1971년 런던 킹스로드에 ‘렛 잇 록(Let It Rock)’이라는 펑크 스타일의 옷가게를 열면서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히피 스타일이 유행하던 때라 찢어진 청바지와 정치적, 상업적 문구가 뒤섞인 콜라주 티셔츠, 스판 운동복, 할렘가 벽면 낙서를 패션으로 옮긴 그래피티 디자인 등의 펑크 스타일은 변두리 패션 중에서도 별종에 속했다. 그러나 웨스트우드는 꾸준히 펑크룩을 추구했다.

영국 펑크문화 전도사

3년 뒤인 1974년 매장 이름을 ‘섹스(Sex)’로 바꾸면서 웨스트우드는 전위적 패션의 주도자로 떠올랐다. 1976년엔 그녀의 연인인 맥라렌이 매니저로 있는 영국 밴드 ‘섹스 피스톨즈’가 무대 의상을 그녀의 매장에서 구입하면서 웨스트우드는 영국을 넘어 세계에 펑크 열풍을 일으켰다.

1981년 웨스트우드는 첫 컬렉션을 영국에서 열었다. 그녀의 첫 무대는 전통적이면서도 독특한 아이디어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란 이름을 패션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영국 디자이너로서는 메리 콴트 이후 처음으로 파리에서 열리는 오트 쿠튀르(맞춤복) 컬렉션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녀는 서구 패션사에 처음으로 비대칭 겹쳐 입기를 제시했다. 남미 인디언에서 영감을 얻은 ‘버팔로 걸’에서는 스커트와 속치마를 겹쳐 입히는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거리 패션보다 오트 쿠튀르에 관심을 갖게 된 웨스트우드는 고급의상에 영국적 전통을 담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거칠고 반항적이지만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은 자유정신, 새로움에 대한 도전정신을 표현하는 펑크가 영국 전통과 만나 영국패션의 근간으로 서서히 자리 잡은 것. 1986년에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미래를 창조하는 방법’이라는 패션 철학으로 18세기 이전의 살롱 문화와 19세기 가구, 그림, 장식품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버슬스커트와 러플, 트레인 등을 부활시켰다. 1987년 ‘해리스 트위드’ 컬렉션에서는 영국적 패션 이미지가 등장했다.

이후 코르셋과 가터벨트, 메탈 스터드 체인 등 과격한 페티스 요소를 영국 왕실 전통 의상에 믹스해 하이패션으로 승화시켰다. 2004년엔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그녀의 작품들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웨스트우드는 매번 유행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여성스런 곡선을 살리는 테일러링 기법으로 제작된 수트 스타일, 과감한 실루엣의 응용으로 한층 더 여성스럽고 글래머러스한 스타일, 여기에 다양하고 밝은 색의 꽃문양과 면, 마, 실크 소재로 실용성을 갖춘다.

과거에서 얻는 영감을 얻다

“창조적인 디자인은 전통과의 교류에서 시작된다. 나는 개척되지 않는, 일종의 생명력을 지닌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얻는다.”

매 시즌 기존 질서와 권위, 도덕적 관습에 도전하는 기상천외한 웨스트우드의 컬렉션은 단순한 쇼가 아닌 역사적 의미를 갖는 컬렉션이다. 과거와 전통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움, 이것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거리패션인 ‘펑크룩’을 명품반열에 올릴 수 있었던 까닭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의상은 크게 4가지 상품군으로 분류된다. 가장 고가인 골드 라벨은 오트 쿠튀르로 생산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이뤄진다. 이브닝드레스와 코르셋 등과 같은 섬세한 의류들은 오트 쿠튀르 전통에 따라 두 세명의 장인이 수작업을 통해 만든다. 레드라벨은 골드 라벨보다 캐주얼하면서 상업적인 디자인으로 발고 경쾌한 느낌의 의상으로 모든 상품을 이탈리아에서 생산하고 있다. 1996년에 런칭한 남성복 라인은 자신의 제자이자 25살 연하인 세 번째 남편이 직접 디자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캐주얼 의류군인 앵글로 마니아는 데님 소재를 이용한 옷이다.

그녀는 지금도 현대문명을 쓰레기라고 매도하며 영화는 실패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라며 일절 보지 않는다. 남과 달라야 하며 현대적인 것은 모조리 배척한다. 이런 비비안웨스트우드의 특이한 삶과 패션 속에는 명품 철학도 숨어 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정말 좋은 것으로 딱 한 가지만 사고 두 달 동안 입어보라”고 충고한다. 진짜 명품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1992년 켄신턴궁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 51세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속옷도 걸치지 않은 채 속이 훤히 비치는 드레스를 입었다. 카메라 플래시 탓에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나체는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런 사진이 여러 신문들을 장식했다. 올해 나이 69세. 할머니 다자이너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도발과 반항의 상징인 ‘펑크룩’을 명품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영국 패션계의 여왕’, ‘펑크의 1인자’, ‘살아있는 국보’ 등으로 불리며 가장 영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사랑받고 있다.

김수진 기자 ksj@gfeo.or.kr

<추억의 브랜드>

버스 회수권

우리나라에서 버스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11년 마산과 삼천포행 버스였다. 마산~ 삼천포 구간 요금은 1인당 3원80전이었고, 진주~삼천포 구간은 1원30전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가 4원 정도였으니 꽤나 비싼 요금인 셈. 과거에는 부자들만 탔던 버스가 현재는 우리에게 가장 값싸고 편리한 대중교통수단이 된 것이다. 그런 버스를 타려면 토큰이나 버스 회수권이 필요했다.

1970년대 초반의 중고생 학생 회수권 모음 회수권가격 장당 10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가격이 올랐고 2005년 버스 회수권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졌다. 현재 우리나라 버스요금은 성인기준으로 1,000원이다. 토큰과 회수권 대신 이제는 교통카드 또는 교통기능을 겸비한 신용카드만 있으면 어떤 대중교통 수단이건 상관없이 탈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됐다.